[펌]유럽의 계급정치 역사과 코포라티즘--민주주의와 계급정치 서평중에서

민주노동당의 미디어스타인 노회찬은 최근 인터뷰에서 자신이 그리는 대안사회의 모델은 스웨덴식 사민주의라는 견해를 밝힌 적이 있다. 진정추 멤버들은 사회주의를 향한 의회주의적 길을 찾다가 결국은 사민주의로 귀착한 셈이다. 이수호 위원장도 인터뷰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식의 발언을 일관되게 하고 있는데, 아마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민주노동당 내에는 '사회주의적 지향'을 강화하자는 입장들도 적지않다. 그럼 이 때의 '사회주의'는 노회찬의 그것과 얼마나 다를까? 몇년 전부터는 지난 민주노총 선거에서 '범좌파' 그룸의 하나로 입장을 정리한 중앙파에 속한 인사들의 경우에도 스웨덴 모델에 관심을 갖고 국제산별조직들의 후원을 받는 북유럽 연수를 가는 모습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사민주의를 완전히 거부하는 정치적 입장은 뚜렷하게 쇠퇴하고 있다.

북유럽의 사민주의 모델이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정작 그것이 남한 사회에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 것같다. 기껏해야 민주노동당을 통한 의회진출이 확대되면 가능하다는 정도다. 민주노동당의 2012년 집권계획(sic!)도 있지 않은가.

'서유럽 정치와 정치경제의 역사적 전개'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비록 사민주의가 추구할 만한 이상이라는 관점에서 쓰여졌지만, 그것이 가능했던 조건이 무엇인지 보여줌으로써 환상에 깨는 데 도움을 준다. 19세기 말 이후 서유럽 정치를 계급정치의 틀에서 분석하고, 그것이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코포라티즘-사민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저자에 따르면 서유럽의 정치지형은 '계급정치'로 규정할 수 있다. 다만 '민주적으로 조절된'다는 수식어가 붙어야한다. 19세기 말부터 대중적으로 형성된 노동자정당과 노동조합이 20세기 초 자본주의의 위기를 거치면서 성장하고, 유럽 각국의 기본적인 정치지형을 '사민주의정당 대 비사민주의정당'의 구도로 형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구도는 약화되고는 있지만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전후 유럽에서 '민주적 코포라티즘'과 이를 매개로한 사민주의 체제가 가능했던 데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최근 많은 글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민주의 정당이 전후 케인즈주의적 타협의 집행자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케인즈주의적 합의가 유효성을 상실한 반주변의 21세기에, 유럽의 20세기를 반복한다는 것을 불가능하다.

케인즈주의적 합의는 전후 1950~60년대의 황금기, 전후 마샬플랜에 의한 유럽의 제건기에 가능했던 정책이다. 모든 나라에서 사민주의 정당이 케인즈주의 정책의 실행자였던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강력한 지지자였다. 북유럽의 몇몇 나라들에서 사민주의 정당은 1차 대전 이후에 이미 前케인즈주의적 정책을 이미 수용했다.

저자는, 북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이러한 '정책적 혁신'이 그들이 집권할 수 있게 한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지적한다. 그러한 '혁신'이 지체되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경우는 20세기말, 이미 자신들의 정체성을 해체한 가운데서 집권할 수 있었을 뿐이다. 20년대 대공황을 거치면서 케인즈주의 정책이 자본주의를 위한 올바른 처방이 된 조건과, 사민주의 정당이 '정책적 혁신'을 한 시간이 맞아떨어진 결과가, 그들 정당의 집권이었다.

한편, 케인즈주의적 합의 외에도 중요한 역사적 요인을 감안해야한다. 그것은 유럽의 대부분 나라들에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이르는 동안 전체 노동자 계급을 성공적으로 동원한 노조운동이 전개되었다는 점이다. 낮게는 40% 정도에서 높게는 80% 이상까지 노동자들을 조직한 이들 노조는, 자신들이 만든 정당이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노조의 조합원이 집단적으로 당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통이 되었다.

이러한 성공적인 노조 조직화는 역사적으로 특수한 사례이다. 유럽 외의 어느 지역도 이러한 성공에 이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길드 전통을 이은 숙련공 노조가 대량생산 시기의 미숙련 노동자들의 조직과 결합하는 과정 등을 거치면서 전체 노동자대중을 성공적으로 조직해냈다.

산별노조도 이 과정에서 형성되었는데, 주목할 점은 기업별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이 아니라 직종노조가 산별노조로 전환하는 과정이었다는 점이다. 벽돌공, 전기공, 목공 노조로 별도로 조직된 노동자들도 하나의 사업장에서 일한다면 뭉치는 것이 교섭력을 높이는 길이다. 따라서 이들이 만약 건설공사장에서 일을 한다면 '건설산업노조'로 결집하는 과정이 산별노조의 건설과정이다.

산업적인 수준의 교섭도 교섭이지만, 산별노조로 결집하는 것은 사업장에서 각각의 자본가들과 교섭하는 데도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경로는 민주노총의 산별건설 경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사업장단위로는 이미 충분한 교섭력을 가지고 있는 노동조합들을 '산별교섭'을 매개로 통합하려는 민주노총의 계획은 아래로부터 자발적으로 산별노조로 결집하는 힘을 형성하기는 쉽지 않은 방식이다. 개별단위 노동조합으로는 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중소영세 사업장은 결집하겠지만 말이다. (금속노조의 건설과정과, 금속 대공장의 산별노조 불참) 상이한 노동전통이 노동조합의 조직형태를 다르게 규정하는 셈이다. 하지만, 민주노총은 '노동운동의 발전경로'에 따라 산별노조가 '시대의 흐름'이라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들 나라에서 노동자라면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단체협약의 적용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당신 회사에는 노조가 있습니까?'와 같은 질문은 별로 의미가 없을 것이다. 유럽의 나라들과 남한에서 노동자운동과 관련한 전통이 전혀 상이하다는 점, 따라서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거나 지지하는 것도 다른 양상을 보이고, 노동조합의 형태도 다르다는 점이 중요하다.(어쩌면 '전통이 상이하다'라기 보다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단절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민주노동당은, 노동조합의 조직률이 극히 저조한 상태에서 노동자 대중의 집단투표에 의해서 집권하기는 힘들다. 당 지도부도 그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국민정당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정당의 의제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데 그 장면은 이번 국회에서 충분히 보여줄 것이다. (당장은 이번 민주노동당 대표, 최고위원 경선에서 후보들이 무엇을 말하는지 지켜보라.)

하지만 더 나쁘게는 민주노동당이 실행하고자하는 케인주주의 정책이 사실은 실현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요즘에는 '비정규직 정규직화로 내수를 창출하자'는 주장을 경제위기에 대한 '대안'으로 내놓고 있는데, 내수침체는 결과이지 원인이 아니라는 점에서 해결책으로 보기 힘들다.

한편, 코포라티즘 체제는 사민주의의 필수적인 옵션이다. 문제는 코포라티즘적 합의기구는 사민주의 정당이 도입하는 것이라는 점, 따라서 사민주의 정당의 성장에 뒤따르는 것이지 앞서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따라서 사민주의 정당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합의기구도 정교하게 발달한다.) 사민주의 정당과 노조는 자신의 영향력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노사정합의기구를 선호한다.

그리고 노사정 합의의 내용이 케인주의 정책의 실현을 위한 실행정책이라는 점에서 케인주주의적 합의의 실행자로서 사민주의 정당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필립스곡선에 따라 낮은 실업률, 임금억제를 통한 낮은 인플레이션 등)

여기에 부르조아들이 응하는 이유는, 사민주의 정당의 압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노조와 정치적 합의를 이룰 경우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인한 비용손실을 크게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조의 조직률이 자본가들이 겁낼 만큼 충분히 높을 뿐 아니라 전국적 정상조직이 산하노조에 대해 가지는 통제력이 자본가들이 합의를 신뢰할 만큼 충분히 높아야한다.

이런 조건 역시 남한에서 확보하기에는 무척 어렵다. 한국노총은 민주노총을 견제하기 위한 옵션 정도에 불과하고 실제 위협적인 파업을 할 수도 없고, 중요한 대기업도 없기 때문에 별로 의미가 없다. 그러나 민주노총은 전체 노동자중 6% 정도에 불과한 조직률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산하조직에 대한 통제력이 지극히 취약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부르조아 정부가 '사회적 합의'(노사정위)를 제안한다고 해도 그것이 아무런 내용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남한에서 사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프로그램은 악순환에 빠진다. 낮은 조직률 하에서 사회적 합의도 불가능하고, 집권도 마찬가지인데다 집권을 위한 정책은 실현이 불가능하다.

스웨덴 사회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념적 지향을 떠나서 그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런 사회를 만들어낸 정치적 구조가 사민주의 정당의 집권, 케인즈주의적 합의, 민주적 코포라티즘이라는 진단도 정확하다. 그러나 여기까지다. 그것이 남한에서 반복될 수 있으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한지 보아야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전개된 사민주의의 위기라는 정세가 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의 효과라면, 그 영향은 남한도 빗겨가지 않는다. 스웨덴 사민주의가 그나마 이런 위기를 가장 지연시켰다면, 그것은 스위덴 노동자운동이 자본가들과 대립적인 입장을 종종 유지하고 이를 통해 노동자대중을 결집시켜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스스로 대중운동을 무장해제 하면서 사민주의 체제를 만들어내겠다는 주장은 무모해보인다. 20세기에 시효만료된 것은 舊소련식의 사회주의 체제만이 아니다. 그 효과로 사민주의 역시 위기에 빠졌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계적인 사회운동들과 함께 새로운 대안을 찾아가는 일이다. 따라서 사민주의 정당이 아니라, 사회운동이 강화되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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