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총수 청와대 모임의 의미


“(경제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 중에는 순수한 우려도 있지만, 의도적인 우려의 목소리도 없지 않은 것 같다. 개혁을 저지하기 위해서 (중략) 위기를 확대해서 주장하고 (중략) 국민들의 불안을 조장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지난 15일 노무현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문 발표 장면을 지켜보던 재벌들의 표정은 굳어졌다. 대통령의 개혁의지는 발표 전에 미리 언론에 나눠준 원고 수준보다 훨씬 강한 톤이었다. 공정거래위원회에 맞서 연일 경제위기를 강조하며 지금이 한가하게 개혁타령이나 할 때냐고 목소리를 높였던 재계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모습이었다. 반대로 개혁진영에서는 “기대 이상”이라는 긍정평가가 쏟아졌다. 담화문 내용은 개혁을 찬성하는 사람들이나,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모두 노 대통령이 집권 2기를 맞아 드디어 개혁의 고삐를 죄려는 것같다는 전망을 낳고 있다. 그리고 25일 노 대통령과 재벌총수들과의 청와대 모임이 향후 재벌개혁의 향배를 가늠하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경제계의 관심이 온통 집중돼 있다.

그러나 단정은 아직 이르다. 그동안 말로는 개혁을 외치고도 용두사미로 끝난 전례가 많기 때문이다. 디제이(김대중)는 지난 99년 8·15 경축사에서 “한국 역사장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하는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재벌들은 ‘재벌해체 선언’으로 받아들이며 초긴장했다. 그러나 추상같던 개혁의지는 2000년 4·13 총선을 전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1년말에는 출자총액제한제도를 누더기로 만들고 재벌들의 금융지배를 용인하며 재벌에게 ‘백기’를 들었다. 역사는 디제이를 개혁에 실패한 대통령이라고 기록했다.

노 대통령도 대선운동 기간은 물론 대통령 취임 초반까지는 재벌개혁 의지를 강력히 천명했다. “구조조정의 ‘5+3 원칙’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상시 구조조정을 지속적으로 추진할 것이며, (중략) 그동안 구조조정 과정에서 이완된 부분을 점검하고 보완해서 투명성, 공정성, 예측 가능성 있는 시장경제시스템을 구축해 나갈 것이다.”(2002년 12월28일 전경련 초청 세미나에서) “출자총액제한제도 등 3대 재벌 개혁과제는 흥정 대상이 아니다. (중략) 재계가 자꾸 재벌정책을 흔들고 있고 심지어 왜곡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 문제를 정면돌파하겠다.” (2003년 1월3일 대통령직 인수위 전체회의에서)

그러나 지난 1년간 참여정부의 경제개혁에 대한 점수는 그리 높지 않다. 온 나라를 뒤흔든 에스케이사태나 카드사태 처리는 모두 시장경제원리와 경제개혁의 원칙은 훼손된채 관치금융의 부활과 대마불사 신화의 재현 등 실망스런 결과만 낳았다. 재벌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수사도 총수들에게 면죄부만 주며 법치주의의 실종을 초래했다. 대통령이 강조했던 경제정책 이념과 맞지 않는 보수 경제관료의 중용은 개혁진영의 강한 비판을 불러왔다.

물론 노 대통령으로서 할 말이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여소야대 국회와 여권의 분열, 보수언론의 끝없는 흠집잡기, 불안한 국내외 경제상황은 대통령의 발목을 잡아았다. 또 참여정부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재벌의 편법 상속·증여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세법개정을 통해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를 도입했다. 또 기업회계의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증권 집단소송제도 도입했다. 재벌개혁의 골간인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도 지난해말 완성됐다. 하지만 이 로드맵은 정부안만 확정됐을 뿐이지 법 개정을 통해 완전히 제도화된 것은 아니다. 갓난아기에 비유하지만 아직 엄마 뱃속에 있다고나 할까?

그래서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시장개혁 3개년 로드맵을 구체화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은 반대론자들에 막혀 극심한 ‘산통’을 겪고 있다. 재벌의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의 합리적 개편과 재벌의 금융지배 폐해를 막기 위한 재벌 소유 금융사의 계열사 주식에 대한 의결권 축소 등이 핵심쟁점이다. 재벌은 물론 정부 내 재벌비호 세력들의 ‘반개혁 연대’는 여전히 강력하다. 공정위는 재경부의 반대에 부딪혀 재벌 금융사의 의결권을 3년에 걸쳐 현행 30%에서 15%까지 단계적으로 줄이는 ‘절충안’을 만들었지만, 개혁론자들은 재벌의 금융지배 차단을 위해서는 미흡하다는 평이 많다. 장하성 고려대 교수는 지난 16일 제주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 연차총회에서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가 (출범 2기를 맞은) 노무현 정부의 향후 개혁의지를 확인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노 대통령의 향후 진로를 읽을 수 있는 또 다른 바로미터는 오는 25일로 예정된 재벌총수들과의 청와대 모임이다. 역대 대통령과 재벌총수들의 모임은 재벌개혁 정책의 향배를 결정짓는 분기점이 돼왔다. 재벌을 개혁으로 내몰기 위한 독전의 자리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개혁을 포기 또는 후퇴하면서 총수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미는 자리였다. 디제이가 98년 초 5대그룹 총수들을 불러모아 투명성 제고, 경영진의 책임 강화 등 재벌개혁 다섯가지 원칙에 합의한 것은 전자의 사례이다. 지난 5월 노 대통령이 재벌총수들과 삼계탕집에서 만난 것은 후자의 사례이다. 청와대의 한 인사는 이런 비판에 동의하면서, “이번 청와대 모임은 대통령의 강한 개혁의지가 담긴 대국민 담화문의 연장선에서 이해하면 될 것”이라고 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노 대통령은 재벌총수들과의 단독회동을 일절 안해왔다. 재벌총수들과의 밀실회동은 곧 정경유착의 시작이자 재벌개혁의 종말을 의미한다는 의식 때문이다. 지난 1년간 노 대통령의 경제정책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 개혁진영에서조차 이 대목에 대해서는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 반면 재벌들의 반응은 정반대이다. 4대그룹의 한 고위 임원은 “정부가 투자를 하라고 하는데, 대통령이 회장들을 직접 일대일로 만나기 이전에는 힘든 것 아니냐”고 말했다. 기업들의 투자부진을 정치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위험하고, 현실과도 맞지 않는 일이지만, 재벌개혁 정책에 대한 일종의 ‘사보타지’ 성격이 섟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또 다른 포인트는 참여정부의 경제팀 내 역학관계이다. 최근 들어 이 역학관계에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참여정부 내 대표적 개혁인사들이 본격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경제팀에는 역대 어느 정권 때보다 많은 수의 개혁인사들이 고위직에 포진해 있다.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현 정책기획위원장)을 비롯해 강철규 공정거래위원장, 이동걸 금융감독위원회 부위원장이 대표적이다. 지난 2월 개각에서는 김대환 교수가 노동부 장관으로 가세했다. 하지만 지난 1년간 이들은 재벌과 관료, 보수언론 등 반개혁연대에 포위된채 제 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했다. 그나마 강철규 공정위원장의 고군분투가 두드러졌을 뿐이다. 하지만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둘러싸고 재벌개혁 논쟁이 본격화되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이동걸 금감위 부위원장은 지난 8일 금융연구회 토론에서 “참여정부의 경제개혁은 시장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을 의미한다”며 “합리적 원칙을 세우기 위한 최소한의 노력이 급진적 개혁으로 비치는 것은 그만큼 기득권의 뿌리가 깊다는 것을 방증한다”고 일갈했다.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지난 11일 경북대 특강에서 “(경제)성장이 중요하다고 얘기를 하지만 장기적으로 개혁없이는 (성장이) 불가능하다”며 “일시적 경기부양과 몇발작 못가 발병이 나는 성장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성장우선론자들에게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또 “얼마 전 주요 7개국(G7) 회의에서도 ‘개혁은 지속적 성장의 전제 조건’이라고 결의했는데 하물며 우리가 개혁을 뒤로 하고 성장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딱잘랐다. 강철규 공정위원장에게는 모두 엄청난 ‘지원사격’이었다. 이들 개혁인사들의 발언이 사전조율된 흔적은 없다. 당사자들의 주변에서도 부인한다.

하지만 이심전심으로 현안에 대해 강하게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을 예사롭지 않게 보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노 대통령의 담화문 내용에서는 이들 개혁인사들이 평상시 강조해온 말들의 흔적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개혁인사들은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경제현안에 대해 자기생각을 밝힐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 특히 성장우선론을 내세워 재벌과 코드를 맞추고 있는 재경부와 이헌재 경제부총리의 독주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까지 있다.

흔히들 개혁은 정권의 힘이 있는 집권 초기에 밀어붙여야 한다고 말한다. 노무현 대통령은 17대 총선에서 여당의 승리와 헌재의 탄핵기각 결정으로 힘을 갖게 됐다. 이제 참여정부가 경제개혁을 통해 잠재성장력을 키우고 지속적으로 성장해갈 수 있는 기초체력을 갖출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곽정수 대기업전문기자 jskwa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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