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 원 서
존경하는 재판장님,
법을 통해 고심하며 정의를 실현하시려는 재판장님의 노고에 존경과 감사함을 표하며 감히 글을 올립니다.
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는 1990년 창립되어 의약품 접근성 확대와 국민 건강권 향상, 보건의료제도의 공공성 강화를 위해 활동하는 약사들의 시민사회단체입니다. 또한 여성의 성·재생산 건강과 권리보장, 안전한 임신중지 보장을 위해 오랫동안 활동해 왔습니다.
특히 임신중지 의약품의 국내 도입과 안전한 사용 환경 마련을 위해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어 왔으며,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이전인 2018년에 ‘그 약이 알고 싶다 4th_이미 그녀들은 충분히 아프다’(별첨 1)를 발간하여 당시 형사처벌 체계가 여성들의 건강과 안전에 미치는 문제점을 사회적으로 알리고, 안전한 임신중지와 여성의 건강권 보장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습니다.
본 단체는 이 사건 항소심 재판에 대하여 피고인의 무죄 선고를 탄원하며, 다음과 같은 의견을 드립니다.
1. 본 사건은 사회·제도적 불확실성과 의료접근성의 공백 속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헌법재판소는 2019년 형법상 낙태죄 조항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현재까지도 국회와 정부는 임신중지와 관련한 법률 및 제도를 정비하지 못하였고, 임신주수별 임신중지 기준, 의료서비스 제공 체계, 후기 임신중지에 대한 가이드라인 등에 관한 공식적인 체계를 마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결과 임신중지를 필요로 하는 여성들은 적절한 의료정보와 지원체계로부터 배제된 채 음성적이고 비공식적인 경로를 이용하도록 내몰리고 있으며, 본 사건 또한 그러한 제도적 공백 속에서 발생하였습니다. 특히 피고인은 임신 사실을 매우 늦게 인지하였고, 여러 의료기관을 방문하여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적절한 상담과 지원을 받지 못한 채 결국 브로커가 개입한 의료기관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의 입법 공백과 의료체계의 부재속에서 발생하였다는 점이 충분히 고려되어야 합니다.
2. 임신중지 당사자에게 살인죄의 책임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1심 판결은 피고인이 의료진과 공모하여 살인을 실행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피고인은 의료진으로부터 실제 수술 방법이나 태아 처리 과정에 대해 구체적인 설명을 듣지 못하였으며, 수술은 전신마취 상태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피고인이 반복적으로 확인하고자 했던 내용은 "태아가 사산되는 것인지" 여부였고, 실제로 브로커와 지인 사이의 대화에서도 "사산된다"는 취지의 설명이 전달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료적인 지식이 있다고 생각되는 저희 약사들조차도 피고인의 상황이었다면 구체적인 수술 방법과 그 이후의 의료행위를 정확하게 알지 못 하고, 적극적인 질문 역시 어려웠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고인이 임신중지를 선택한 사실 자체 또는 의료행위의 세부 과정을 적극적으로 질문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살인의 고의를 인정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됩니다.
3. 본 판결이 확정될 경우 향후 임신중지 당사자들에게 광범위하게 살인죄가 적용될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임신주수에 따른 임신중지 방법, 태아의 생존 가능성 판단, 사산 처리 절차, 의료진의 설명의무와 기록의무 등에 관한 명확한 국가 차원의 표준 지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은 제도적 불명확성 속에서 임신중지 과정 중 태아가 생존할 가능성이 있었다는 사후적 평가만으로 임신중지 당사자에게 살인죄의 공동정범 책임을 인정한다면, 향후 유사 사건에서도 임신중지를 요청한 여성에게 살인죄가 광범위하게 적용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4. 재생산 건강권과 공중보건의 관점이 고려되어야 합니다.
저희는 안전한 임신중지 서비스에 대한 접근 보장이 국민 건강을 위한 공중보건 정책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임신중지를 형사처벌의 문제로만 접근하기보다 의료와 건강의 문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임신중지 당사자에 대한 과도한 형사처벌은 오히려 음성적 의료시장과 불법 브로커 시장을 확대시켜 여성의 건강권을 더 침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회적 고립 상태에 놓여 있던 임신중지 당사자에게까지 살인죄 책임을 인정하는 것이 공중보건의 관점에서 타당한지 재검토가 필요합니다.
5. 맺음말
저희는 2018년 ‘이미 그녀들은 충분히 아프다’를 통해 낙태죄가 여성들을 처벌하고 침묵하게 만들면서도 정작 건강과 안전은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을 사회에 알리고자 했습니다.
8년이 지난 지금, 저희가 이 사건에 깊은 우려를 표하는 이유는 특정 개인의 선처만을 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제도적 공백과 정보 접근이 어려운 상황에서 임신 중지를 선택한 당사자의 살인죄 선고가 향후 여성들의 건강권과 재생산권에 미칠 영향이 매우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재판장님께서는 공중보건과 건강권의 관점에서도 본 사건을 살펴주시기를 요청드리며, 피고인에 대한 무죄 판결을 탄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