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약이 알고 싶다_31번째]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신약 심사? 식약처 '속도전' 누굴 위한 건가

* 이 이미지는 AI가 생성한 것입니다.

 

 

- 신약 허가 기간 단축의 맹점과 의약품 접근성의 진짜 장벽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에 때아닌 '속도전' 바람이 불고 있다. 오유경 식약처장은 2026년 업무보고에서 의약품 허가·심사 기간을 현행 420일에서 세계 최단 수준인 240일 이내로 대폭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전문 인력을 300명이나 늘리는 대규모 충원 계획도 함께 밝혔다. 식약처장의 말대로 신약 허가 기간이 8개월 내외로 단축된다면, 한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심사 속도를 자랑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던 허가·심사 부서에 인력이 충원되는 것은 긍정적이지만, 수천 명 규모의 미국과 유럽의 심사 인력에 비하면, 여전히 턱없이 부족하다. 무엇보다 환자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야 할 규제기관이 '속도' 그 자체를 목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부실 심사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여기서 냉정하게 짚어봐야 할 핵심은 따로 있다. 신약을 빠르게 허가한다는 것이 과연 환자의 실질적인 의약품 접근성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질까? 한국의 의약품 접근이 늦은 이유가 단순히 식약처가 그동안 허가 심사를 천천히 해서였을까?

심사 기간보다 앞서는 제약사의 '시장 논리'

전 세계에서 신약 허가 심사가 가장 빠른 나라는 어디일까? 국제 보건의료 정책 학술지 <헬스 어페어즈>(Health Affairs)의 최신 연구는 2014년부터 2018년 사이 미국 식품의약국(FDA)이나 유럽 의약품청(EMA)에서 승인된 241개의 신약을 대상으로 각국의 규제 심사 기간을 추적했다.[1] 이 연구에 따르면 일본 의약품의료기기종합기구(PMDA)의 심사 기간 중앙값은 9.2개월로 가장 짧았다. 가장 오래 걸린 유럽(14.1개월)에 비해 약 5개월이나 심사를 빨리 끝낸 셈이다.

그렇다면 일본 환자들은 유럽보다 신약을 먼저 투약받고 있을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허가 시점을 기준으로 비교하면 일본은 유럽보다 3.2개월 더 늦게 신약을 허가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심사가 가장 빠른데도 약이 늦게 도입되는 이유는 명백하다. 제약기업들이 심사 속도와 무관하게 일본보다 유럽에 먼저 허가 신청서를 내기 때문이다.

이윤을 추구하는 제약사에 가장 중요한 신약 출시 기준은 규제기관의 심사 속도가 아니라 시장 규모와 수익 잠재력이다. 시장 규모가 클수록, 그리고 더 높은 출시 가격을 받을 수 있을수록 제약사는 해당 국가에 먼저 허가를 신청한다. 결국 시장 중심의 의약품 공급 체제에서는 정부가 아무리 심사 기간을 단축하며 '레드카펫'을 깔아주더라도, 약이 환자에게 도달하는 순서는 제약사의 철저한 수익 극대화 전략에 따라 정해질 뿐이다.

'빠른 허가'가 가린 미국의 민낯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그리고 가장 폭넓게 신약을 사용할 수 있는 국가는 단연 미국이다. 다국적 제약사들은 전체 신약의 70%를 미국 FDA에 가장 먼저 제출한다. 덕분에 미국 국민들은 유럽보다 평균 5.2개월, 일본보다 8.4개월 일찍 신약을 접한다. 출시 비율도 압도적이다. 조사된 신약의 98%가 미국에 출시되었지만, 호주(63%)나 일본(49%)은 절반 안팎에 그쳤다.

하지만 미국의 빠른 접근성은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다. 미국은 제약사가 출시 시 신약 가격을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어 약값이 매우 비싸다. 더 큰 문제는 무분별하게 빨리 도입된 고가 신약들이 정작 환자에게 꼭 필요한 '치료적 가치'를 제대로 입증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이다.

미국 FDA가 암 환자들을 위해 초고속으로 심사해 준 신약들의 추후 성적표를 보면 그 심각성을 알 수 있다. 한 국제 연구에 따르면, 이렇게 조기 허가된 암 치료제 가운데 후속 연구에 '환자의 수명을 실제 연장했다'고 확인된 약은 32%에 불과헀다.[2] 환자가 덜 아프고 편안하게 지내도록 '삶의 질을 개선했다'고 증명된 약은 12%로 더 처참하다. 진짜 오래 사는지, 고통은 줄여주는지 증명되지 않은 수많은 약들이 엄청나게 비싼 값에 팔리고 있었던 것이다.

제약사의 숨은 전략이 여기서 드러난다. 치료 효과가 확실한 좋은 약은 여러 나라에 신속하게 허가 신청을 서두르지만, 효과가 모호한 약일수록 여러 국가의 검증을 피해 미국에만 출시하는 꼼수를 부리고 있는 것이다.

누구를 위한 규제 완화인가

한국의 환자들이 신약을 사용하기까지 시간이 걸리는 이유는 식약처의 심사 속도가 느려서가 아니다.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불확실한 약을 선별해 내기 위한 '급여결정 과정(의료기술평가, HTA)'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기존 치료제와 비교해 정말 환자에게 이득이 있는지 검증하는 이 과정 때문에 제약사들은 굳이 한국에 먼저 출시를 시도하지 않는다.

그런데 최근 '선등재 후평가'같은 제도가 속속 도입되며 급여 절차마저 간소화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식약처의 규제가 유연해지고 실제 치료 효과를 입증하지 않은 조건부 허가가 남발되는 상황에서 급여 평가의 문턱까지 낮추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이는 임상적 유용성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비싼 약들을 미국처럼 무비판적으로 사주겠다는 선언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효과 좋은 약의 접근성 개선으로 이어지기보다는, 치료 가치가 낮은 약의 출시만을 부추겨 건강보험 재정을 갉아먹고 불필요한 약물 사용을 늘리는 결과를 낳을 우려가 크다.

식약처가 내세우는 '심사기간 단축'은 결코 환자의 신약 접근성을 높이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지 않는다. 신약이 우리에게 빨리 도달하지 않는 가장 큰 장벽은 제약사의 철저한 시장 논리다. 심사 기간을 아무리 줄여도 효과가 불분명한 약들은 건강보험 급여의 벽을 넘을 수 없으며, 넘어서도 안된다. '세계 최단 기간 허가'라는 식약처장의 화려하고 현혹적인 구호에 속아 우리는 속도전을 즐기고 있어선 안 된다. 오히려 제약기업들의 숨은 의도를 의심하고, 진짜 환자를 위한 제도가 무엇인지 돌아볼 때다.

 

[참고 문헌]
[1] Irene Papanicolas 외, 「Review Times For New Drugs And Submission Delays Among The FDA And 4 International Regulators, 2014-22」, Health Affairs 45, no. 2 , 2026.
[2] Ariadna Tibau 외, 「Assessing outcomes emerging after conversion to regular approval for cancer drug indications granted accelerated approval, 1992-2021」, JNCI 117, no. 10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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