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 급여 기준 완화 논란... 다국적 제약사에 항복 선언?
지난 1일(현지시각), 영국과 미국이 전격적으로 의약품 관련 관세 합의를 발표했다. 미국이 영국산 의약품 등 의료 제품에 대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임기 동안 관세 0%를 약속하는 대신, 영국이 자국의 공공 보건 시스템인 국민보건서비스(NHS)의 약값을 높여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영국이 단순히 약값을 일괄적으로 올리겠다는 결정이 아니다. 이 합의의 핵심은 신약 급여 결정 기준의 변화에 있다.
영국 NHS는 신약의 급여 여부를 결정할 때, 임상데이터를 바탕으로 삶의 질 보정 수명(Quality-Adjusted Life Year, 아래 QALY)을 추정하여 신약의 비용 대비 효과를 엄격하게 계산한다. 쉽게 말해 '1년을 건강하게 더 살게 하는 데 얼마까지 쓸 수 있는가'를 따지는 것이다.
이번에 영국이 신약 가격을 높이기로 했다는 것은, 이 QALY당 지불 가능한 가격 기준을 상향하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기존에는 신약의 1 QALY당 2만~3만 파운드(3911만~5866만 원) 미만일 때만 비용효과적이라고 판단했으나, 이 기준을 25%가량 대폭 인상하겠다고 밝혔다.
결국 제약사들은 영국에 1 QALY당 3만 파운드(5866만 원) 넘는 고가 정책을 고수하더라도 NHS 급여의 문턱을 쉽게 넘을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제약사들이 영국에 약을 비싸게 팔기 쉬워졌다는 의미다.
이러한 결정에 영국의 보건 싱크탱크인 너필드 트러스트(Nuffield Trust)는 "이번 결정이 NHS가 국민 전체에 추가적인 혜택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단지 의료비용만 추가로 지불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약사에 30억 파운드(5조 8663억 원)를 더 가져다주는 대신 다른 의료 보장성을 확보할 기회비용을 잃는다고 비판한 것이다.
보건 시민단체인 저스트 트리트먼트(Just Treatment)는 "환자가 아니라 제약산업 로비에 굴복한 결정"이라고 규탄하며 NHS 자원이 고가 신약에 분산될 것을 우려했다. 영국 자유민주당 보건 및 사회복지 대변인인 헬렌 모건은 이번 정부의 결정을 "트럼프의 NHS에 대한 강탈"이라고 규정하며 기존 NHS 서비스 악화 등 환자 피해를 우려했다.
5억 원짜리 항암제의 급여 결정

▲길리어드 사이언스연합뉴스
영국은 혁신적 신약의 출시에도 고가의 가격을 쉽게 수용하지 않는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2년 전이성 유방암 치료에 사용되는 길리어드의 트로델비(성분명 사시투주맙 고비테칸)라는 약의 급여 결정 과정이다.
트로델비는 유방암 중에서 기존의 호르몬 치료제나 표적치료제로 효과적이지 않은 삼중음성 유방암 치료제로 개발되었다. 개발 초기부터 혁신적인 치료기전으로 각광받았는데 다국적 제약사인 길리어드가 개발사인 이뮤노메딕스를 210억 달러(당시 환율로 25조 원)에 인수하면서 양상이 크게 바뀌었다. 어마어마한 가격에 인수합병을 한 길리어드는 트로델비의 가치를 크게 높여야 했기 때문이다.
트로델비는 3주마다 주기적으로 사용하는 주사제인데, 미국에서 1사이클당 가격이 2만 달러(2940만 원)로 알려져 있다. 1년 동안 17사이클을 사용한다면 가격은 34만 달러(5억 원)에 달한다. 이처럼 제약사가 천문학적인 가격을 요구한다면, 대부분의 국가는 수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비싼 가격 문제는 영국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영국 정부 산하의 의약품 비용효용성 심사기구인 국립보건임상연구소(NICE)는 분명히 암 환자의 생존 기간을 유의미하게 연장하는 약임을 인정했음에도, 허용하는 가격 기준을 넘어섰기 때문에 트로델비의 급여를 수용할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반면에 제약사는 투자된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 가격을 낮추기 어려웠다. 그 과정에서 영국 정부와 환자단체, 길리어드 간에 큰 갈등을 빚었다.
그럼에도 환자단체의 급여 요구를 외면하기 어려웠던 영국 정부는 아주 제한적인 범위에서 트로델비의 급여를 결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갈등은 영국뿐만 아니라 캐나다, 노르웨이, 네덜란드,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하게 반복되었다. 특히 네덜란드는 2년 넘게 급여 결정이 지연되었고, 뉴질랜드는 재정 영향 문제로 아직도 급여 결정이 되지 못했다.
반면 한국은 의외로 트로델비의 급여 결정이 큰 논란 없이 이뤄졌다. 초고가 치료제였지만 정부는 치료제의 혁신성을 고려하여 비용효과성 기준을 유연하게 적용했고, 그로 인해 지난 6월부터 급여 적용을 받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급여 결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환자단체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다. 2024년 1월과 5월 트로델비에 대한 건강보험 급여 등재를 요구하는 국회 국민동의청원이 2차례 이어졌고, 이러한 요구들이 비용효과성의 유연한 적용까지 이끌어낸 것이다.
압박 없는데 스스로 문턱 낮추는 한국
보건복지부(아래 복지부)는 지난 11월 28일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를 개최하고 '약가제도 개선방안'을 발표했다. 이번 개편안에는 신약과 제네릭 의약품에 관련된 여러 약가제도를 통째로 뒤바꾸는 내용이 담겼다. 특히 눈에 띄는 점은 QALY당 지불 가능한 가격을 인상하겠다는 결정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트로델비의 사례를 보면 한국은 외국에 비해 특별한 논란 없이 급여 결정이 이뤄질 정도로 비용효과성 평가에 유연하게 대처해왔다. 그럼에도 이번에 문턱을 더 낮추겠다는 결정은 그냥 다국적 제약사에 대한 항복 선언에 가깝다. 특히 영국은 미국에 관세 0%를 받아내기 위해 내놓은 대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 정책은 황당한 수준이다. 영국은 최소한 트럼프의 압박이라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한국은 무엇 때문에 스스로 무릎을 꿇는 것일까?
건강보험 보장성 문제는 단순히 정부 지원 여부에 머물러선 안 된다. 특히 다국적 제약사라는 거대한 힘이 작동한 상황에서 정말 그 약이 효과적인지, 가격은 적절한지, 과정은 투명했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그러기에 이번 개편안은 너무 황당하다. 영국은 트럼프 압박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신약 급여 기준을 완화했다. 그럼에도 영국 내에서는 "제약산업 로비에 굴복했다", "NHS에 대한 강탈"이라는 거센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반면 한국은 어떠한 외압도 없고, 얻는 것도 없이 스스로 신약 급여 문턱을 낮추겠다고 나섰다. 이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훨씬 높은 약제비 비중을 감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약사에 일방적인 선물을 안겨주는 것에 불과하다.
더 큰 문제는 이로 인해 발생할 재정 부담이다. 신약 급여 기준이 완화되면 고가 신약들이 쏟아져 들어올 것이고, 한정된 건강보험 재정은 이들 약제비에 집중적으로 투입될 수밖에 없다. 그 결과 다른 필수 의료서비스의 보장성은 약화되거나 일반 국민들이 부담해야 할 본인부담금과 보험료가 증가할 것이다. 영국 너필드 트러스트가 우려한 것처럼, 제약사에게 더 많은 돈을 가져다주는 대신 다른 의료 보장성을 확보할 기회비용을 잃게 되는 것이다.
제발 이번 개편안은 일장춘몽으로 끝나기를 바란다. 국민의 건강보험료로 다국적 제약사의 배만 불리는 정책이 아니라, 진정으로 국민 건강을 위한 합리적인 약가 정책이 수립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