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공제약사 설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
'민간 자본이 수도권 노른자 땅 택지 개발에 오래전부터 군침을 흘리고 있었다. 공영개발이 검토되었으나 무산되고 결국 민간 자본 참여를 허용한 민관 합동 개발 모델로 전환되면서 민간사업자에게는 엄청난 수익이 예상되었다. 개발권 유치를 위해 민간사업자는 각계각층에 수백억 원대 뇌물을 약속하거나 전달했다.'
이러한 류의 택지 개발 관련 부정부패 사건을 뉴스에서 접할 때가 있다. 개발사들은 돈이 될 만한 곳에 아파트를 짓는다는 이유로 막대한 돈을 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개발권을 따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그 과정에서 각종 부정부패 사건이 쏟아진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땅에서만 발생하지 않는다.
의약품 시장의 특별한 성격
자본주의 사회에서 수많은 상품이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하려 한다. 같은 종류의 셔츠라고 하더라도 디테일한 디자인의 차이를 이용하기도 하고, 유명 모델의 이미지를 빌려 차별성을 입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와 달리 서로의 '같음'을 부각해 상품 가치를 입증하는 특별한 영역이 있다. 바로 의약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부분의 약은 최초 개발 회사의 제품이 아니라 그것과 동일함을 입증하여 개발된 '제네릭(복제) 의약품'이다. 제네릭 의약품은 국제적 규제 기준에 맞춰 최초 개발사 약과 동등하다고 평가받은 제품이다. '같음'을 추구하는 제네릭 의약품 시장은 이상하게 부동산 개발과 닮아있다.
엠파글리플로진(상품명 자디앙)이라는 당뇨치료제가 있다. 이 약은 심혈관 질환 예방 효과로 주목받았고, 동반 질환이 있는 당뇨환자에게 우선순위로 선택된다. 당연히 매출도 매년 증가해 2024년 기준 시장규모가 1000억 원에 달한다.
그런데 이 약의 특허가 10월 만료되면서 제네릭을 생산하는 제약회사에는 기회의 땅이 열릴 것으로 보인다. 이미 제네릭 허가를 받은 업체가 60개가 넘고 너나 할 것 없이 엠파글리플로진이라는 '노른자 땅'에 아파트를 짓기 원한다.
60개 넘는 업체가 모두 시장 점유율을 확보하려 하면서 벌어지는 일은 가격 경쟁이 아니라 '영업력' 경쟁이다. 제약회사의 과당경쟁은 병원과 의사들에 대한 리베이트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제약회사는 출시와 함께 기존 회사 제품을 자사 제품으로 바꾸도록 의사들을 설득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검은돈이 오갈 확률이 높다. 경쟁을 통해 약값이 낮아지고 환자 부담이 줄어들 가능성은 거의 없다. 오히려 여러 업체가 뛰어들어 과도한 생산이 발생한다.
이렇듯 돈이 되는 약은 특허가 만료되자마자 제약회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지만, 이윤이 많이 남지 않는 약에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난다. 한 해 동안 한국에서 생산·공급이 중단되거나 부족하다고 보고되는 의약품이 200~300건에 달한다. 대부분은 오래된 약, 저렴한 약, 소수 환자가 사용하는 약이다. 누군가에게는 치료에 꼭 필요한 의약품이지만 제약회사 이윤에 따라 제때 공급을 받지 못하게 된다. 결국 의약품은 경제적 동기에 따라 과잉 생산되기도 하고 과소 생산되기도 한다.
의약품은 전기처럼 될 수 없을까
흔하게 접하는 것 중에 누가 생산하든 큰 구별점은 없으면서 적정한 양을 생산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전기 에너지다. 전기는 국민의 기본 생활을 영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재화다. 그리고 전기 사용자는 화력발전소나 풍력발전소 등 생산지를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또한 특별하게 많이 생산하거나 부족하게 생산되어서도 안 된다. 이러한 특성은 공적 생산에 적합하다.
전력산업을 민영화하고 수익성을 우선시하게 되면, 저소득층이나 외딴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전기 접근에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 또는 독점적 지위에 의해 가격이 크게 상승할 우려도 크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여러 정권에서 전력 산업 민영화를 검토했으나 결국 무산되었다.
알고 보면 제네릭 의약품도 전기와 매우 유사한 특성이 있다. 국민의 삶에 직결되며, 어디서 생산하든 효과는 동등하고, 적정한 양이 안정적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하지만 의약품은 전력시장과 다르게 수백 개의 민간 제약회사들이 자신들의 이윤에 따라 생산한다.
의약품도 공적 주도로 생산하는 방법이 있다. 바로 공적 생산·공급 거버넌스를 마련하는 것이다. 수익성이 아니라 공공성에 기반하여 의약품의 생산·공급을 결정하고, 이를 공적 통제 가능한 생산 시설을 이용하여 직접 약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것이다.
이러한 거버넌스는 소외질환, 이윤이 남지 않는 의약품을 생산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으며, 반대로 약값을 낮추고 과도한 생산을 통제하는 방식으로도 작동할 수도 있다. 또한 코로나19 팬데믹처럼 감염병 대응에 필수적인 약의 생산이 부족한 경우, 즉각 필요에 의해 생산량을 늘릴 수도 있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

▲국민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약품은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생산되어야 하며, 이를 달성하려면 공공성 기반 생산방식이 훨씬 유리하다.연합=OGQ
생소할 수 있지만 이러한 주장은 오랜 기간 논의되었다. 2010년대부터 신종플루 등 감염병 위기에 관련 치료제 공급이 어려움을 겪고, 필수성이 큰 의약품이 공급을 중단하면서 시민사회 내에서 정부가 공공제약사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어 왔다. 특히 2017년 대통령 선거 당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대선 공약으로 공공제약사 설립을 약속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또다시 공공제약사 설립이 쟁점이 되었지만 끝끝내 이행되지 못했다.
정부는 이제 제약회사는 당연히 민간이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떨쳐버려야 한다. 의약품 생산을 민간기업이 담당해야 할 만한 특별한 이유는 결코 없다. 국민 생명과 건강에 직결되는 의약품은 이윤이 아니라 필요에 의해 생산되어야 하며, 이를 달성하려면 공공성 기반 생산방식이 훨씬 유리하다.
이를 위해 기존 국내 제약기업도 두 가지 갈림길에서 선택하면 된다. 국내에서 고정적 이윤을 담보로 공공 거버넌스에 속하거나, 또는 의약품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기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한국 제약산업의 고질적인 다품종소량생산의 비효율적인 생산 체계를 버리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서야 한다.
공공제약사 설립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과제다.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는 일을 시장의 논리에만 맡겨서는 안 된다. 진정한 제약·바이오 강국은 모든 국민이 필요한 약을 적정한 가격에 공급받는 국가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