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약이 알고 싶다_15th] 백신 광고에 등장한 아이돌 그룹, 이유 있었다

- 약의 사회적 인식 엿볼 수 있는 HPV 백신 광고 변천사

 

올해부터 사람유두종바이러스(Human Papilloma Virus, HPV) 백신 국가예방접종 대상이 남자로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질병관리청은 아직 구체적인 도입 계획은 밝히지 않았으나 접종 대상자 확대를 목표로 올해 3229억 원의 예산을 추가로 배정받았다.

최근에는 청소년을 넘어 성년까지 확대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크다. 사람들은 HPV 백신의 접종 대상자를 확대해야 한다는 점에 대체로 공감한다. 우리는 어떻게 HPV 백신 접종 대상자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을까?

과거 HPV 백신은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불렸다. 어린 여성을 위한 백신으로 알려졌지만 지금은 더 다양하고 많은 사람들이 접종하고자 한다. 약은 바뀐 게 없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접종하려 한다니 무슨 이야기일까?

약은 임상적 검증을 통해 이용할 수 있는 질병이나 적응증 대상이 확대될 수 있다. HPV 백신이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불렸던 것에는 제약회사 마케팅과 파이프라인 개발 측면의 전략이 들어있다. HPV 백신을 빠르게 개발하려 했던 제약회사들은 자궁경부암 예방효과에 집중했고, 어린 여성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기 때문에 HPV 백신을 자궁경부암 백신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렇다면 HPV 백신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떻게 변화했을까? HPV 백신 광고를 통해 도입 초기부터 지금까지 HPV 백신에 대한 사회상을 살펴보자.

화목한 가족과 어른을 강조한 2010년대 HPV 광고

2014년 자궁경부암 공익광고 "여자라면 알아야 하는 자궁경부암"한국건강증진개발원


2014년 한국건강증진개발원은 자궁경부암 예방의 중요성을 알리는 캠페인을 진행하였다. 공익광고로 배우 박수진을 포함한 서로 다른 연령대 3명의 여성을 모델로 내세웠다. 당시 공익광고는 "여자라면 알아야 하는 자궁경부암"이라는 메시지를 통해 여성의 선택을 내세웠다.

2016년에 처음으로 만 12세 대상 자궁경부암 백신이 국가예방접종에 포함되었는데 제약회사인 한국MSD의 상업광고 전략은 달랐다. 광고모델로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축구선수 출신 안정환과 그 가족을 전면에 내세웠다. 광고는 "소중한 딸을 위한 꼼꼼한 선택!"이라며 딸을 위한 부모의 선택을 강조하였다.

당시 국가예방접종 대상자가 여자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광고는 백신 접종이 부모의 사랑임을 강조하였고 따뜻한 가정을 배경으로 삼았다. 이후에도 비슷한 전략이 이어졌다.

한국MSD는 새로 도입된 HPV 백신인 '가다실9' 광고를 시작하며 여중생을 자녀로 둔 중년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는데 이는 HPV 백신 접종의 주 결정자가 엄마라는 점을 고려한 광고 전략으로 보인다.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백신 접종을 권하는 '서바릭스' 광고글락소스미스클라인


같은 시기 글락소스미스클라인(GSK)의 HPV 백신인 '서바릭스' 광고 전략은 조금 달랐다. GSK의 광고는 여학생들이 백신 접종을 망설이는 장면을 그리다가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자신의 자녀를 출산할 수 있으니 백신 접종을 권고한다. 그러자 여학생이 "네가 뭘 알아?! 남자가!"라고 말하면서 HPV 백신이 여성만의 백신임을 암시하는 장면을 이용했다.

남학생의 대사가 백신 접종의 이유로 출산을 제시하며 건강한 자녀를 출산할 책임을 여성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도 했다. 2017년까지는 HPV 백신이 여성의 백신이자 자궁경부암을 위한 백신이었다.

남성도 백신 접종 대상자로 등장
 

HPV 백신 '가다실9' TV 광고에 출연한 박나래한국MSD


2018년부터 각국에서 HPV 백신 접종 대상자를 남성으로 확대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HPV 백신을 남녀가 함께 맞는 백신으로 설명하기 시작했다. 2019년 HPV 백신 광고에 여성 희극인인 박나래가 등장해 남성과 여성이 함께 백신을 맞아야 예방효과가 크다면서 연인이 함께 맞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백신 접종을 권하는 모델이 점차 엄마에서 남성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20년 광고에는 남성 희극인 조세호, 유병재가 등장하여 여성과 함께 백신을 맞는 모습을 그렸다. tvN 드라마 <청춘기록>에는 주인공 사혜준역을 맡은 박보검이 HPV 백신의 접종에 대해 이해하고 접종을 완료하는 장면이 등장했다.

여자 주인공과 연애 서사를 이어가는 과정에 HPV 백신을 접종하는 장면은 백신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날 방송 이후 포털사이트 검색어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트렌드 상위권에 한동안 '자궁경부암'이 올라왔다.
 

HPV 백신 '가다실9' TV 광고에 출연한 정경호한국MSD


한국MSD는 2021년 광고 모델로 tvN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 의사 역할을 한 배우 정경호를 발탁했다. 정경호는 광고에서 "자궁경부암 예방 백신. 그런데 나한테 가다실9의 광고 모델을 해달라는 거야. 나는 남잔데 왜?", "나이 때문에 포기하지 마"라는 말로 백신 접종이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확대된 연령에 대한 강조도 있었다. 2020년 MBC 예능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의 재연배우로 알려진 김하영을 모델로 한 광고에서 "늦은 나이란 없어! 나는 내 자신을 지켜갈 거야. 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해, 가다실9 늦지 않았어"라며 주체적인 여성을 강조하였다.

앞서 많은 광고들이 자녀나 연인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 결정을 대리하거나 타인에게 권하는 장면을 연출했다면 2020년 하반기 이후 광고모델은 스스로를 설득하며 접종 대상이 '내'가 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팬덤 문화 이용한 백신 광고
 

HPV 백신 '가다실9' TV 광고에 출연한 여진구한국MSD


한국MSD는 2022년 이후 광고모델 이미지를 적극 활용하기 시작했다. 남성이 모델로 등장해 팬덤 층인 여성을 공략하면서 HPV 백신 접종이 남성과 무관하지 않음을 전달하는 내용이다.

2022년 광고는 남자배우 서강준과 여진구를 모델로 등장시켜 "사랑하니까 지금 가다"는 카피를 활용했다. HPV 백신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지켜준다는 느낌과 중년여성이 백신 접종 대상임을 강조하였다. 한국MSD는 이때부터 백신 접종에 포토카드 형태의 접종카드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2023년 HPV 백신 광고에는 보이 그룹인 세븐틴이 등장했다. 글로벌 스타임을 이용한 "미래를 바꾸자, 세상을 바꾸자"(Chane the Future, Change the World)"라는 캐치프레이즈는 백신 접종이 암을 예방하고 스스로 미래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국MSD는 이때도 포토카드 형태의 접종카드를 이용했다. 유명 아이돌의 포토카드를 갖기 위해 백신 접종이 실제 늘었고 카드는 중고시장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되기도 했다.
 

2023년 HPV 백신 '가다실9' 광고에 등장한 세븐틴은 "Change the Future, Change the World"라며 스스로의 미래를 바꾸기 위한 백신 접종을 강조한다. 한국 MSD


이미지 형성하고 변경해 나간 HPV 백신 광고

제약회사의 홍보 전략은 적응증 변화와 여성의 사회적 위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해왔다. 질병과 사회는 상호작용을 하며 특정 질병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수용자의 반응은 미디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광고는 프레이밍 기법을 활용해 광고주가 원하는 특정 정보를 강조함으로써 수용자가 받아들이도록 유도한다. 이는 결국 수용자의 행동 변화로 이어지기도 한다.

HPV 백신은 HPV 감염 예방을 목적으로 하지만, 제약회사의 마케팅 방식에 따라 HPV 관련 질환이 다르게 인식되었다. 초기에는 HPV 백신이 여성에게만 필요한 백신으로 프레이밍되면서 HPV 관련 질환이 여성에게 국한된 질병으로 인식되었다.

이후 제약회사가 남성까지 접종 대상을 확대했고 이를 알리기 위해 광고 방식을 바꿨다. 과거에는 "자궁경부암 백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면서 HPV 감염이 여성의 문제로만 여겨졌지만, 적응증이 확장되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병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광고 메시지도 타인에게 접종을 권유하는 형태에서 점차 개인이 직접 접종을 원하고 스스로 선택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HPV 백신 광고는 질병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만들어내기도 했고 주 대상자의 사회적 역할과 태도 변화를 반영하며 질병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변경해 나갔다.

최근 외국에서는 남성 동성애 커플을 대상으로 하는 HPV 백신 광고도 등장했다. 광고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한국에서도 언젠가 동성애 커플이 등장하는 HPV 백신 광고를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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